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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전적비

영국군 전적비(설마리 전적비)

 

 

 

 

 

 

 


전투 약사

1951년 봄 중공군 제63군의 3개사단은 서울로 향아는 적성.연천지구침공로에 대공격을 감행하여왔으며 적군의 진격로에는 영국군 제29여단이 임진강이 굽어보이는 지역을 방어하고있었다.

영국군 "그로세스터스샤"연대 제1대대는 제170박격포대대 C중대와 오늘날 "임진포대"로 명명된 포병단의 지원을 받고있었다.

영국군 여단휘하의 "벨줌"대대와 두개의 다른대대는 "그로세스터스샤"연대 동측에 포진하였으며 제8"센츄리온"전차대와 25"파운드"포탄의 제45야포대및 제55공병중대가 이를 지원하고있었다.

그러나 여단의 방어지역은 12.000미터에달하는 광범한 전선이였다.

1951년 4월 22일은 따뜻한 봄날씨였으며 바로이날 임진각격전은 시작되었다.

전투첫날밤 "그로세스터스샤"대대는 10배에 달하는 적군에 대항하여 용전하였다.

그러나 다음 2알간의 혈전끝에 설마리 계곡까지 후퇴하였다.(전적비지역)

4월 24일 까지의 격전에서 생존자들은 이기념비위에 솟아있는고지에 집결하였으나 적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

탄약은 거의 소모되고 피로와 허기에 지친상태에서도 대대는 그날밤 적의 연속적인 공격을 물리치고 고지를 사수하였으며 4월 25일아침 적의 포위망을 마지막으로 공파하기위한 공격을 감행하기까지 진지를 고수하였다.

"그로세스터스샤"연대는 혈전끝에 67명만이 탈출에 성공하였으며 이전투에서 59명이 전사하고 나머지 526명은 포로가 되었으며 이들중에는 180명의 부상병이 포함되어있었다.

그리고 3년간의 포로수용소에서 34명이 사망하였다.

이격전에서 "그로세스터스샤"연대는 2명이 최고무공훈장을 받았으며 모든장병들의 희생정신은 세계전사에 빛나고있다.

3일간에 걸친 이들의 과감한 격전은 중공군의 진격을 지연시키고 유엔군의 재편성에 소요되는 시간적 여유를 마련하는데 기여하였으며 또한 중공군의 서울침공을 저지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한편 한국전쟁중(1950~1953)영국군은 1109명이 전사 2674명이 부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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